예금 109조 급증, 좋아할 수도 없는 정부의 답답한 속내

경제일반 / 정민수 기자 / 2020-07-27 13:48:06
코로나 긴급유동성 풀었더니 예금 크게 늘어

"단기성 저축인지 중장기적 자금 비축인지 성격 가늠키 어려워"

정부·중앙은행 향후 재정·통화정책 구사 난감

▲ 돈은 넘쳐나는데 예금으로 들어가면서 정작 시중에는 돌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평상시 같으면 예금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예금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걱정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맹위를 떨쳤던 올해 상반기에 은행권의 수신이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초유의 통화·재정정책을 쏟아냈더니 이 자금 중 상당 부분이 은행 금고로 다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쓰라고 준 돈이 도로 은행으로 들어가 잠긴 것도 곤혹스럽고 시중에 돈은 넘치는데 돈이 모자라는 일이 생기니 이 또한 염려스럽다.

 

무엇보다 통화당국인 정부·중앙은행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공급한 유동성이 은행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는 구조라면 앞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방향성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특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단기자금이 급격히 불어난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안 그래도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자금 때문에 정부가 걱정이 태산이다. 주식도 신용대출까지 하며 몰려드는 자금으로 걱정이 많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분산된 채로 잘 운영되면 좋을 텐데 형편이 그러하지 못하다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은행 수신이 1858조원으로 작년 말 대비 1087000억원이나 급증했다상반기 기준으로 은행 수신이 이처럼 빠르게 증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은행 수신 증가는 코로나19 사태와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109조원 중 108조원이 수시입출금 예금

 

정기예금도 아니고 수시 입출금에 몰려 있으니 염려가 큰 것이 사실이다. 지금 시중에는 일단 돈을 잡아놓고 보자는 심리가 작동 중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라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일단 현금 유동성 확보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자금이 소비로도 가고 투자로도 이어지기를 바랐던 정부로서는 답답한 상황이다.

 

월별로 보면 코로나19 사태 발발 직후인 2월에 359000억원 급증했고, 3월에 331000억원, 5월에 334000억원이 늘었다. 감염자 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된 6월에는 1860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은행 수신의 이처럼 가파른 증가는 기본적으로 대출 증가와 연동해 보는 시각이 많다.

1월부터 6월까지 은행의 기업·자영업자 대출은 총 777000억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도 406000억원 증가했다.

 

종합하면 올해 상반기 중 가계·기업 대출이 1183000억원 늘어나는 사이 은행 수신이 1087000억원 증가한 것이다.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위기 상황에서 대출을 급속히 늘렸지만 소비나 투자에 나서기보다 예금으로 움켜쥐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부가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은 것이다.

 

은행에서 늘어난 수신의 종류를 봐도 이런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늘어난 은행 수신 1087000억원 중 1076000억원이 수시입출식 예금이다. 반면 정기예금은 같은 기간 23000억원 줄었다. 언제든 필요할 때 빼가겠다는 것이어서 돈이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다.

 

한은 관계자는 "급격히 늘어난 수신은 결국 급격히 늘어난 대출과 연동돼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면서 "가계나 기업이나 위기 상황을 맞아 일단 대출을 받아 현금을 확보했지만 막상 쓰지 않고 예금으로 쌓아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또 빈익빈 부익부의 반복이다. 이런 상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간 괴리, 혹은 위기 상황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괴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가계에는 은행이 돈을 빌려주길 꺼리지만, 신용도가 높은 기업·가계에는 풍부하게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 여유가 있는 기업·가계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여유자금을 쌓아놓았으나 쓸 일이 없어 그냥 예금으로 쌓아두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조영무 연구위원은 "미국 주요 나스닥 기업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이나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끓어오르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라면서 "경기 상황을 볼 때 전반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은 작지만 쌓인 돈이 많으니 특정 자산으로 자금이 쏠리면서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부양이 가장 시급... 예금은 넘쳐나고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 재정 당국의 설명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저축이 급증하는 것은 현재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치솟는 저축률이 전 세계 중앙은행에 정치적인 딜레마를 제기하고 있다(Soaring savings rates pose a political dilemma for the world's central banks)'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가계 저축이 급증하면서 정부·중앙은행이 앞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난감하다는 내용이다.

 

가계의 저축이 이미 많아 소비할 준비가 돼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부양책을 구사하면 경제가 과속의 영역으로 접어들 수 있다. 가계가 소비를 주저하고 자금을 계속 비축하는 상황에서 부양책을 끊어버리면 경제가 다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 정부도 이런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은 없어 보인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24일 제18차 혁신성장 전략점검회의 겸 정책점검회의에서 "일각에서는 수요 부족보다 안전한 소비가 어려운 문제"라며 이런 화두를 꺼냈다.

 

안전한 소비의 이면에서 늘어난 가계저축이 있는데 봉쇄조치(lockdown)가 종료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단기적인 성격의 저축인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쌓아놓는 저축인지 정부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저축 증가가 단기가 아닌 중장기적인 성격의 자금 비축이라면 소비 활성화 대책의 강도도 더 높게 끌어올려야 한다"면서 "다만 현재로선 늘어난 저축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려워 추가 대책의 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재정 전문가들은 일단 개인이든 기업이든 간에 소득이 약한 쪽에 지원을 강화하고 규모가 큰 데도 현금을 다량으로 확보하고 있는 곳을 집중 관리함으로써 갭을 줄이는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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