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고환율론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선택 / 뉴시스 제공 / 2011-07-10 15:28:43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였다. 나라 곳간은 바닥을 거의 드러냈다. 잘 나가던 아시아의 호랑이 대한민국은 '고사(枯死)' 직전이었다. 태국에서 발화한 외환 위기의 불길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주변국을 다 집어삼킬 기세였다.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수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달러 한 푼이 절박했다. 1997년 5월, 새로 부임한 강만수 재정경제원 차관은 분주했다. 삼성, LG를 비롯한 대기업들과 통하는 '핫라인'을 개설했다. '달러를 확보하라'는 강 차관의 지시는 주무 과장들에게는 '금과옥조(金科玉條)'이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고환율'도 강 차관의 심중에 있는 빼놓을 수 없는 처방전이었다.

중과부적이었다.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서는 격이었다. 지난 1997년 12월,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행을 선택했다. 이 국제기구는 '벨트 타이트닝 폴리시(허리띠 졸라매기.belt-tightening policy)'를 한국정부에 강요했고, 그 여파로 한계 기업의 도산이 속출했다. 국가 부도사태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 장관을 비롯한 고환율론자들의 신념은 국가부도의 위기를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 절박한 심정은 그때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들에게 '환율은 곧 주권'이었으며, 가장 '효율적인 경상수지 흑자 구현의 수단'이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경제 성장의 '즉효약'이기도 했다. 그들은 종이위에서 병법을 논하는 백면서생들이 아니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현 산은금융 지주 회장),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현 지경부 장관) 등이 대표적인 관료들이었다. '747성장론'을 한국경제호의 비전으로 내세운 이들의 처방전은 '팜므 파탈'처럼 매력적이었다. 지난 4월 금융위원회에서 기획재정부로 복귀한 최종구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급)도 매파로 꼽힌다.

한국경제호와 고환율론자들은 오랫동안 애증의 관계였다. 성장을 위해 금리인하, 환율 인상에 기대는 고환율론자들의 단기 처방전을 외면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었고, 오랫동안 이들의 목소리는 위력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도 점차 변화하고 있는 기미는 뚜렷하다. 원화값이 치솟는 요즘 매파들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징후는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고환율론자 힘빠졌나...원달러 환율 1057원

원-달러 환율은 지난 8일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057.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이 1050원대를 기록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급등하던 2008년 8월 21일 이후 처음이다.

지난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이후, 원달러 환율이 1500원선을 위협하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일각에서는 내년 초 환율이 900원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물가에 '올인'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한데다, 유럽 재정위기나 미국 경기둔화와 같은 대외 악재가 잦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석 삼성증권 거시경제팀장은 "현재 환율은 작년과 비교할 때 10~15%의 절상 속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 속도로 계속 간다면 올해 말 1000원대를 기록하고 내년 말에는 900~950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최근 단기외채가 늘어나자 정부가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에 나서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미세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고환율론자들의 입지가 위축되고 있는 이면에는 집권 하반기로 접어든 현 정부의 추세적 정책 기조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서민 경제 안정을 위한 물가 안정 기조의 강화가 그것이다.


◇물가안정 기조에 고환율론자 설자리 위축

올 들어 소비자 물가(CPI)는 매월 4%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다. 물가상승의 파열음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올해 4분기에는 소비자물가와 근원물가(core inflation)가 역전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근원 물가는 석유류, 농식품을 비롯해 가격등락폭이 큰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산정한 물가지수로, 소비자 물가지수에 비해 더 안정적이다.

근원물가가 소비자물가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은 물가 상승세가 석유류, 농산품 등 일부 품목이 주도하는 양상에서 벗어나 올 하반기 여타 부문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물가 상승세는 미국 양적완화 정책 등의 여파로,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 등 두 차례 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부 여당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부는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물가 안정'으로 옮겨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원달러 환율이 900원선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고통지수(misery index)가 뒷걸음질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여당이 이 상태로 내년 총선과 대선을 치를 수 없으며, 환율은 국민들의 실질소득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고 환율론자들이 위축되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환율에 좌우되지 않는 국내 수출 대기업들의 경쟁력 향상도 '고 환율론자'로 대변되는 성장론자들의 '발호(跋扈)'를 억제하고 있는 시대변화이다.


◇한국기업 환율에 좌우되지 않아…80년대 일본기업 연상

올 들어 한국경제호의 수출 실적은 거의 매월 사상 최고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의 일등 공신은 반도체, 승용차, 석유류 제품, 철강을 비롯한 주력 수출품목이다. 원고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국내 기업들의 상품.서비스 경쟁력이 원달러 환율 하락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수준으로 향상됐다"며 이러한 수출 상승세의 배경을 설명한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 수출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수출 가격을 높여 판매가 감소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이었는데, 이러한 구도가 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80~90년대 미국시장을 싹쓸이하던 일본기업들이 보여주던 욱일승천의 기세를 국내기업들이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수출이 증가하고 있는 배경에는 중국의 부상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경제의 기관차인 중국이 떠오르면서, 한국 기업들의 대중국 자본재 수출 또한 급증하고 있다. 마치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중국경제의 성장과 한국기업들의 수출증가라는 선순환의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경제가 질적인 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고환율론자들이 개입할 여지가 점차 위축되고 있는 셈이다.


◇고환율론자의 위축은 시대 산물…법과제도 고민해야

지난 4월 최종구 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이 금융위원회에서 기획재정부로 돌아왔다.

당시 원화의 강세가 지속되자 그는 강력한 구두개입으로 고환율론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그가 이른바 매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고환율론자들의 소신은 오랜 경험의 산물이다. 대외 여건은 때로 고환율론자들의 소신을 비웃고 할퀴었다. MB정부가 출범한 지난 2008년에도 그랬다. 같은 해 1~9월,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줄곧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들이 늘 고환율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정책을 사줄 이들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락 폭탄'. 치솟는 원달러 환율을 잡기 위해 시장에 달러를 살포해야 했던 기획재정부 강만수 장관에게 새로 붙은 별명은 묘(妙)했다. '원달러 환율 상승을 잠재우기 위해 외환시장이 비교적 한가한 점심 시간을 틈타 달러'를 풀던 정부의 행태를 빗댄 시장의 힐난이었다.

고환율 처방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라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심중(心中)에 새긴 가르침이지만, 시대 변화는 이들도 비켜가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성장론자들이 주장하는 환율인상이나 금리 인하 등 거시경책으로는 경제성장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고, 자칫 국민경제에 부작용만을 남길 수 있다"며 "자본총량과 가용 노동량 확대, 기술혁신을 위한 법과제도, 관행 개선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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