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매거진=심재희 기자] 얼마 전 여자배구계에 희망찬 소식이 전해졌다. 대표팀의 주포 김연경이 유럽진출에 성공한 것. 김연경은 터키의 페네르바체 아즈바뎀에 새둥지를 틀었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소속으로 국내무대를 평정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여자부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고, 더 큰 무대인 유럽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대한민국 최고의 '올라운드 거포'로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게 된다. 스포츠 초대석의 첫 초대손님은 김연경의 유럽진출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원조 올라운드 거포'다. 1980~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로 각광을 받았던 지경희가 그 주인공이다. 힘과 기술을 겸비하면서 매 경기 호쾌한 강타를 네트에 내리꽂았던 추억의 스타 지경희를 만나 배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거포의 변신은 무죄
지경희는 1980~1990년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여자배구 최고의 거포였다. 176cm의 신장으로 배구선수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기술과 힘을 겸비하면서 배구 코트를 휘저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무대에서도 멋진 기량을 뽐내며 '올라운드 거포'라 불리기도 했다. 선수 시절 출중한 기량을 갖출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 물었더니 "사실 유연성이 부족했었다"며 자세를 낮췄다. 대표팀에 뽑힌 후 물리치료사에게 유연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유연성을 기르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이야기가 유연성 연습을 꾸준하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아마도 유연성을 기르면서 기술과 힘이 더욱 좋아진 것 같습니다." 최고의 거포가 되기 위해 다각도에서 노력한 모습이 확실히 내비쳤다.
1998년 결혼과 함께 지경희는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은퇴가 은퇴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배구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었다. 코트를 떠난 그가 향한 곳은 모래사장이었다. 여전히 배구공을 손에 쥐고 '비치발리볼'에 도전하게 됐다. "사실 선수로 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한데, 선수도 지원도 부족하다보니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플레잉 코치로 참여하게 됐죠."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비치발리볼의 선구자로서 모래사장에서 시원한 스파이크를 날렸다. 아시아선수권대회 3위에 오를 정도로 비치발리볼 무대에서도 지경희는 화려한 거포였다.
비치발리볼 선수로서의 모습 이후 팬들은 지경희의 모습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배구판을 완전히 떠났다는 이야기도 적잖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거포로서 화려했던 모습을 보여주던 지경희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2000년대 중반에 경기도 체육회 소속 배구팀에서 활약을 했어요. 그리고 수원시 실업팀에서 플레잉 코치로도 뛰었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배구를 해 왔죠"라며 아마추어와 생활체육 무대에서 계속해서 배구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선수 시절 보여줬던 변화무쌍한 움직임처럼, 은퇴 이후에도 여러 가지 도전을 펼치면서 '거포의 변신은 무죄'임을 증명해보였던 지경희였다.
# 어머니와 함께 스파이크를
지경희는 1998년 은퇴 이후부터 생활체육 무대에서 지도자 겸 선수로 활약해왔다. 국가대표 출신의 그가 발산하는 카리스마는 그가 속한 과천시 팀들에는 정평이 나 있다. "결혼한 그 해부터 과천시어머니배구단(현재 과천시여성배구단)을 지도하게 됐습니다. 햇수로 13년째에 접어들었네요." 아마추어 팀을 지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어머니들 모두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배구를 하십니다. 정말 열정이 대단하죠. 참가자들의 배구에 대한 순수함이 정말 남다릅니다"라며 과천시여성배구단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매우 즐겁다는 뜻을 나타냈다.
과천시여성배구단은 지경희 감독의 지휘 아래 일취월장 전력이 나아졌다. 취미와 건강 관리로 참가한 어머니들이 배구에 큰 재미를 느끼면서 점점 더 기량이 좋아졌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강팀으로 거듭나고 있다. "사실, 처음 이 팀을 맡게됐을 때는 취미 이상은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데, 같이 배구를 즐기다 보니 더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즐겁게 하는 배구'를 알고 있는 어머니들이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승부욕을 적절하게 더해줬습니다. 이제 즐겁게 그리고 멋지게 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의 배구열정과 지경희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더해져 과천시여성배구단이 멋진 배구팀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실제로 과천시여성배구단은 성적 면에서도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도민체전 3위에 오르면서 가능성을 확실히 인정받았고, 올해 생활체육 무대에서 동두천 팀을 꺾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동두천 팀은 10연패를 노리던 최강의 팀이었다. 지경희 감독이 이끄는 과천시여성배구단이 시나브로 발전해 최강의 팀을 꺾은 것이다. 기본기도 확실하지 않은 선수들로 이뤄진 팀에 지경희 감독이 어떻게 에너지를 불어넣었는지 궁금했다. 지경희 감독은 관련 질문에 "어머니와 함께 스파이크를 하면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 하나에 최선을 다하라'인데요. 인생 경험이 풍부하신 분들이라 배구 코트에서도 잘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눈높이'의 힘
소위 말해 국가대표로서 날렸던 지경희 감독. 현재 생활체육 무대에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지만, 엘리트체육 쪽에 대한 욕심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선수 시절 보여줬던 호쾌한 스파이크처럼 "당연히 욕심나죠"라며 시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에서 구애의 손짓을 받기도 했습니다. 도 좋은 조건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또 올 거라고 봅니다." 지경희 감독은 솔직한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면서 언젠가는 배구를 생업으로 하는 후배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엘리트체육 쪽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생활체육은 접고 더 집중적인 준비를 해야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지경희 감독은 손사래를 쳤다. 기량과 조건 등은 차이가 있겠지만 생활체육에서도 많은 부분을 얻었고 또 얻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생활체육 무대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더 많은 부분을 느끼고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눈높이'의 힘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데요. 지도자 중심이 아닌 선수 중심으로서 모든 부분을 맞춰야 팀으로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팀이 빛나기 위해서 지도자는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성숙한 답변을 내놓았다.
아울러 지경희 감독은 엘리트체육 무대에 다시 서게되더라도 생활체육에서 몸소 배운 '눈높이'의 힘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더 나아가 '눈높이'의 힘을 엘리트체육에서도 잘 발휘해서 멋진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선수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지도자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단순히 선수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동반자로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잘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눈높이'의 힘을 잘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생활체육이든 엘리트체육이든 선수들의 동반자가 되어줄 겁니다."
# 김연경에게 꼭 하고 싶은 말
다음으로 서두에 언급했던 김연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 보면 김연경과 지경희는 닮은꼴이다. 탈 아시아급 기량을 갖추고 있어 국제대회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고, 어떤 위치와 자세에서도 상대 수비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천후 공격수'인 것도 닮아 있다. 마른 듯한 체격이지만 파워도 수준급을 자랑하고, 코트에서 파이팅을 불어넣으면서 경기를 주도하는 것도 둘의 공통분모다. 김연경과 닮은꼴이라는 말에 지경희 감독은 "그런가요?"라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재 최고의 선수인 김연경과의 비교과 흐뭇한 기분을 들게했던 모양이다.
선배로서 후배 김연경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하자 지경희 감독은 우선 "극히 드문 선수"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신을 넘어 대한민국 여자배구 역사상 최고의 거포라는 찬사를 내놓았다. 그는 "우선, 연경이는 기본기가 탁월합니다. 거기에 서브-수비-공격으로 이어지는 배구의 3박자를 모두 완벽히 갖추고 있죠. 장신이지만 힘과 기술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경이가 최고의 기량을 뽐낼 나이라고 보는데요. 배구에 눈을 뜬 모습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은 활약을 펼칠 겁니다"라며 김연경의 출중한 기량과 무한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아끼는 후배이니 만큼 '값진 충고'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경희 감독은 기다렸다는듯이 솔직한 이야기들을 내놓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은 '몸관리'였다. 김연경이 현재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지만 몸관리에 좀더 신경을 써야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지인으로부터 연경이의 무릎와 어깨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젊고 큰 부상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몸관리를 잘해야 이런 조그만 부상들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항상 몸을 잘 만들어둬야 합니다. 잔 부상을 당하지 않아야 은퇴할 때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선배로서 후배 김연경을 아끼는 진심어린 마음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 국가대표 감독을 향해!
현재 지경희 감독은 과천시여성배구단 이외에도 지경희의 배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배구의 열기를 전하면서 지도자의 능력을 쌓아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배구란 무엇인가?'라는 조금은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이에 지경희 감독은 "나의 인생에서 떼래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우문현답이었다. 선수시절부터 약 30년 동안 그와 항상 함께 했던 것이 바로 배구였고,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배구와 함께 할 것이 확실해 보였다. "항상 배구를 생각하다보니 두 명의 조카도 배구를 시키게 됐네요"라며 웃는 모습에 특유의 배구사랑이 잔뜩 묻어나왔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물었다.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국가대표 감독을 언제나 꿈꿉니다." 배구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이자 명예라고 할 수 있는 국가대표 감독 자리를 지경희 감독 역시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다. "배구를 하면 할수록 인생이랑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운 순간도 있고 괴로운 순간도 있기 마련이죠.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이 모두 존재했기에 배구가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프로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한 다음, 능력을 인정받아 국가대표로서 당당히 팀을 강하게 키워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경희 감독은 과천시여성배구단의 연습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어머니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카리스마를 발산하는가 하면, 몸에 무리가 온 어머니의 다리에 직접 테이핑을 해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눈높이'의 힘을 확실히 알고 팀 구성원들과 쉴 새 없이 교감하며 동반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올라운드 거포'로 유명세를 떨쳤던 지경희. 이제는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를 익히면서 배구의 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올라운드 거포' 지경희가 '올라운드 지도자'로 거듭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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