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제작 CJ엔터테인먼트)는 공포물이다. 잔혹한 살인장면이나 귀신, 괴물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돈과 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스산하게 보여준다.
태생부터 처절한 사람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진창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 공포가 어느 때 느끼는 두려움보다 목을 죄어온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시킨다.
영화는 2005년 광주광역시 무진에서 발생한 청각장애학교 성폭행사건을 소설로 옮긴 공지영(48)씨의 동명작품이 원작이다. 귀로 듣고 글로 읽던 충격 실화가 정교한 구성과 함께 물리적으로 대형 스크린에 구현될 때 안길 수 있는 파괴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중년의 교장·교사가 열살이 갓 넘은 소년·소녀들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교묘한 편집과 촬영으로 다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부분이 상상력을 자극, 더 큰 고통을 안긴다. 정중동의 묘미를 아는 카메라 워크는 화려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긴장과 음험함 등 들쑥날쑥한 심리를 적확하게 포착해낸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잔인하게 상처를 받을 때 침잠하면서도 날카롭게 귀를 스쳐 지나가는 음악은 공포감을 더한다.
뜨거움을 발산할 여지가 곳곳에 산재돼 있음에도 절제한다. 오히려 이런 부분들이 울컥거림을 부추긴다. 청각장애학교에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 '강인호'(공유)가 장애 아이들을 지켜주고자 백방으로 뛸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 무기력이 온몸으로 체감된다.
장편소설을 2시간여짜리 영화로 압축하다 보니 내용을 덜어내고 변경한 부분도 있다. 원작에서는 강인호의 학교 선배인 인권센터 간사 '서유진'(정유미)이 밝은 캐릭터의 나이 어린 동생으로 나온다. 강인호의 아내는 죽은 것으로 설정되고 대신 그의 어머니 존재가 부각됐다.
소설보다 영화에서는 강인호의 무기력함이 다소 완화됐다. 원작에서 강인호는 약자들이 벌이는 최후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가지만 영화에서는 이 싸움에 발을 들인다. 그러나 결국 돈과 권력에 밀려 허무하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건 두 장르 모두 매한가지다.
주연배우 공유(32)의 지적처럼 강인호가 과거 서울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갖게 되는 여학생에 대한 트라우마 등을 덜어낸 부분은 다소 아쉽다. 무기력하게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인호의 심정을 더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옮기는 과정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만하다.
입양을 다룬 '마이 파더'가 전작인 황동혁(40) 감독은 사회 문제가 담긴 영화를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를 능숙하게 보여준다. 교회와 법원, 학교, 관공서 등 미디어의 사회면을 간간히 장식하지만 절대 드러나지 않는 성역 또는 권력의 치부를 고발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맹목적적 분노가 아닌 방향성 있는 격한 감정을 동요시킨다.
뜨겁게 달구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건 정공법이라 쉬운 선택이다. 황 감독은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차갑게 식히는 연출 솜씨를 과시하며 관객들의 감성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아우른다. 다만, 너무 선과 악을 2분법적으로 그려내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일반화시킨 점은 아쉽다.
평소 로맨틱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 '스위트 가이'로 통하는 공유는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강인호에게 전적으로 공감했다는 그는 무기력한 캐릭터의 눈빛을 아이러니하게도 잘 살려냈다. 비중은 많지 않지만 극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서유진 역의 정유미(28)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영화처럼 실제 이 학생들을 성폭행한 교장과 교사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정상적으로 출근하는 교사도 있다. 반면 진실을 위해 싸운 교사들은 직위 해제됐다. 가장 현실적인 공포가 무엇인지 영화는 다시금 환기한다. 22일 개봉한다.
가장 현실적인 공포영화 ★★★★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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