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897년 몽끗왕이 레오13세 교황을 알현하는 모습
[데일리매거진=남영진 논설고문] 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은 쭐라룽껀 대학이다. 아시아에선 서울대학, 동경대학, 대만대학, 베이징대학, 필리핀대학등 보통 국가명이나 도시명을 쓰는 대학이 그 나라의 대표 대학이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왕립대학인 쭐라룽껀, 몽끗, 랑캄행대학 등이 유명하고 사립대학인 타마삿대학이 탑수준이다.
우리 서울대학에 해당하는 쭐라룽컨대학이 방콕 중심지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 쭐라룽컨이 타이 방콕 왕조(차끄리왕조)의 제 5대 왕인 라마5세(재위 1868~1910)다. 1853년 출생해 1910년 사망했으며 태국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왕이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인 라마4세인 몽끗(Mongkut)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왕비의 첫째 아들이다. 부왕이 적극적인 서양 교육을 시켜 어릴 때부터 영화에서처럼 영국여인 가정교사와 서양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라마4세인 몽끗(Mongkut)왕은 라마 1세의 손자이자 라마 2세의 적장자였다. 그러나 부왕의 죽음 후 귀족들이 후궁의 자손인 낭클라오(Nangklao,라마 3세, 재위 1824~1851)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몽끗은 방콕 도심에 있는 보워니웻(Bowonniwet) 사원의 초대 주지승이 됐다. 그는 사원 내에서 라틴어·영어 등의 외국어와 서양 학문을 교육하고, 기독교교 선교사들의 설교도 허용했다.
라마 3세의 건강이 위독하자 당시 군장교와 수상을 겸직하였던 분낙(Bunnag, 1768~1855)이 몽꿋을 제 4대 국왕으로 옹립해, 4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서양의 언어와 국제 관계에 해박하였던 핀클라오(Pinklao)를 서열 2위인 차왕(the Second King)으로 임명해 귀족들에게 왕궁에 입궁할 때는 서양식 복식을 갖추도록 했고 서구 출신의 용병을 채용해 군대를 훈련시켰다.
▲사진=1897년 몽끗왕이 레오13세 교황을 알현하는 모습에 대한 설명을 한 동판
최초의 신문인 《방콕 리코더, Bangkok Recorder》를 출간했고,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많은 시녀들을 출궁시켜 혼인을 허락하고, 강제결혼도 금지했다. 이 과정이 1860년대 태국 왕실의 가정교사로 와 있던 안나부인의 회상기 형태로 <왕과 나>라는 영국작가 마거릿 랜든(Margaret Landon)의 소설과 영화에 모티브가 됐다.
라마5세인 쭐라룽껀이 15세 때 몽끗 부왕이 서거하여 왕위에 올랐지만 어려서 수리야웡(Somdet Suriyawong, 재임 1868~1873)이 5년간 섭정했다. 섭정 기간 동안 그는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서구의 문물과 교육제도 등에 견문을 넓히고,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우의를 다졌다..
그는 이미 서양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서구를 돌아보면서 왕자 자격으로 바티칸을 방문해 로마교황을 알현했다. 그때는 사진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그림으로 남겨 지금 방콕주재 바티칸대사관 로비에 걸려있다.
지난 여름 한국인 장인남 대주교가 방콕주재 바티칸대사여서 대사관에 초청을 받아 그 그림을 확인했다. 사진밑에 ’시암의 쭐라룽껀왕과 교황 레오13세 바티칸서 만나다.1897년 6월4일‘이란 동판이 새겨져 있다.
귀국한 쭐라룽껀은 서양에서 배운대로 정치·경제·사회 개혁에 주력하였다. 20개의 소 왕국으로 분산되었던 왕국을 중앙집권화하고, 서구와 같은 내각 제도를 도입하는 등 행정조직을 개편했다. 군대도 서양식 무기와 제도를 갖추도록 했다. 화폐인 바트(Baht) 화를 발행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국가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지방 귀족들의 탈세를 방지했다.
그는 또한 국민 교육을 장려하고, 쭐라룽껀대학 등 교육 시설을 설립했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 외국과 맺은 조약의 치외법권을 없애는 등 불평등조약의 개정에 노력하여 국권회복과 보존에 힘썼다.
영,불의 식민화를 노리는 제국주의는 철저히 배격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태국내 철도 부설을 제안했지만 주권 침해를 우려해 거절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안 되는 실리적인 균형외교를 펼쳤다.
그가 존경받는 진짜 이유는 또 있다. 전통적 노예 제도와 납작 엎드려 절하는 부복(俯伏,prostration)을 철폐해 근대적 신분제도를 도입한 점이다. 당시 태국에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노예 신분이 대물림되고 군대를 안 갔거나, 도둑질 등 각종 범죄를 저질러 노예가 된 국민이 3/1 이상이었다. 1905년 노예제도를 전격적으로 없앤 이유가 전해진다.
▲사진=1897년 몽끗왕이 성베드로성당 로비서 가족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
그에게는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인이 있었다. 일부다처제에다 정략결혼으로 무려 113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가 가장 아낀 아내는 수난타 왕비. 그녀는 1880년 5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첫 딸을 안고 왕이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으로 가던 배가 뒤집어져 물에 빠졌지만 강의 수심이 깊지 않았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지만 그 누구도 왕비와 공주를 구하지 않았다. 결국 왕비와 공주, 그리고 뱃속의 태아까지 사망하고 만다. 이는 뜻밖에도 노예제도 때문이었다.
노예는 고귀한 왕족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되기 때문에 누구도 수난타 왕비를 구하지 않은 것. 이에 쭐랄롱꼰 왕은 1905년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됐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태국화폐 100바트에 쭐랄롱꼰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그가 사망한 10월 23일은 국경일 ’쭐랄롱껀의 날‘(Chularlongkorn Day)로 휴일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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