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新한국기행①] 화천 양구– 전두환 정권이 만든 ‘평화의 댐’이 효자(孝子)됐다

남영진의 세상이야기 / 남영진 논설고문 / 2018-11-23 10:25:57
‘평화의 댐’, 1987년 2월 북한의 금강산 임남댐의 수공을 방어하는 대응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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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영진 논설고문


[데일리매거진= 남영진 논설고문] 고려대 73학번 40여명이 가을 야유회를 강원도 화천과 양구군으로 갔다 왔다.

두 군 사이를 흐르는 북한강 상류 비수구미 계곡을 트래킹한 뒤 산채비빔밥과 막걸리로 점심을 먹고 보트를 타고 파로호를 가로질러 말썽 많았던 ‘평화의 댐’을 찾았다.

댐 위쪽에 하얀 글자로 ‘평화의 댐’이 새겨져 있고 언덕1,000여 평 부지에 '세계 평화의 종’공원이 조성돼 있다.

평화의 종은 분쟁의 역사를 겪었거나 분쟁중인 국가 60여 개국에서 보내온 탄피 37.5톤으로 높이5m, 폭3m 규모로 제작됐다.


재밌는 것은 이 종을 타종할 때 1인당 500원을 내는데 이 돈으로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의 전쟁 피해자를 돕는다는 것이다.

이디오피아는 6,25당시 참전 유엔군 16개국의 하나로 아프리카에선 유일하다.

주변 야외전시장엔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종들이 전시돼 있다.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종들이다.


이탈리아 칼리시 도메니코 파피 시장이 성 산타 키리아 수도원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하던 동종을 보냈다. 태국의 평화운동가 술락 시바락사 박사는 방콕의 불교사원에서 사용하던 종을 보내 왔다.


평화의 댐은 화천읍 동촌리에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2월 북한의 금강산 임남댐의 수공을 방어하는 대응 댐을 만들어야 한다며 국민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 임남댐의 최대 저수량이 200억㎥에 달해 이를 방류하면 12~16시간 안에 수도권이 수몰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때 걷힌 국민 성금 639억 원을 포함해 총 사업비 1,666억 원이 들었다. 1989년 1단계 공사에 이어 2006년 2단계 공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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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평화의댐 표지판 ⓒ데일리매거진

기념 벽에는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러시아), 리고베르타 멘추(과테말라), 한승수 전 국무총리(한국), 데스몬드 투투(남아공), 호세 라모스 오르타(동티모르), 메어리드 코리건 맥과이어(북아일랜드), 아돌프 페 레스 에스키벨(아르헨티나), 마르더 아더사리(핀란드), 모하메드 유누스(방글라데시) 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시린 에바디(이란) 씨의 사진과 핸드프린팅이 전시돼 있다.


에바디는 2003년 이곳서 평화 강연회를 가진바 있다. 평화상 수상자 기념 벽에 들어서면 한승수 전 총리가 먼저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초기 1년7개월간 국무총리를 역임한 그는 2001년 김영삼 대통령시절 외교통상부장관이었다.

당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9·11테러가 일어난 바로 그 날 제56차 유엔총회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유엔의 위기관리에 최선을 다한 공로로 2001년 유엔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수상했다. 유엔총회 의장 자격이었다. 그래서 2000년, 2001년 연속 한국인이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한 의장은 국제테러의 위기 속에서 유엔총회 의장직을 원만히 수행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덕택에 제8대 유엔사무총장으로 반기문 씨를 배출했다. 반 사무총장은 재선돼 세계정치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이날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아침 7시40분에 만나 2시간 반 관광버스를 타고 화천군 비수구미 계곡에 도착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파로호로 가는 내리막길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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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엔의장으로 200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한승수 전 외교부장관 ⓒ데일리매거진

원시림 사이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길을 1시간 반 걸어내려가니 파로호가 나타났다.

출렁다리 넘어 ‘비수구미’라는 금표가 있다.

파로호는 1944년 일제 강점기 말기에 화천발전댐 준공으로 생긴 호수다.

이승만대통령이 한국전쟁 때 중공군과의 마지막 격전지인 이 호수에 중공군 3만 명을 수장시켰다고 ‘파로호’(破虜湖::오랑케를 격파)라고 명명했다.

인근에 '철의 삼각지' '양구 펀치볼 전적비' '고성 통일전망대'를 연결하는 통일안보 관광지가 개발돼 있다.


비수구미 계곡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가 겨우 인가가 보이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댐이 생기기전에는 화전민촌이었을 곳에 식당으로 개조한 집이 2채 보였다. 예약된 식당으로 올라갔는데 우리가 먹을 식사를 다른 팀이 다 먹었단다. 우리 것을 누가 먹었나 알아보니 다른 등산 팀이 몇 명 씩 들어와 드셨단다. 배가 고파도 좀 참고 겨우 끼니를 해결했다. 고추장에 비빈 산채밤와 도토리묵, 호박전등이 막걸리와 입맛을 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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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평화의 종 타종현장 ⓒ데일리매거진

1993년 김영삼 정부는 북한 금강산 임남댐의 수공 위협과 그로 인한 피해 예측이 크게 부풀려졌다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면서 2단계 공사도 중단했다. 거의 10년후인 2002년에 와서야 댐을 높이는 2차 공사를 시작해 2005년 10월에 공사를 마쳤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한 평화의 댐이 점점 필요한 것으로 변해갔다.

북한이 2002년 초 공사를 재개한 금강산댐에서 초당 206t씩 흙탕물이 쏟아내 화천댐에 지장을 주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대응 댐이 필요하다고 알았지만 5공의 산물이어서 댐을 더 높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2002년 19일간에 걸쳐 북한 댐으로부터 3억5000만t의 물 폭탄이 쏟아져 평화의 댐이 무너질 뻔했다.

북한에 방류 중단과 공동조사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햇볕정책'의 김대중 대통령은 3단계 보강 공사를 지시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평화의 댐을 더 높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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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중공군 3만명이 수장됐다는 파로호수 ⓒ데일리매거진

화천군 고위공무원의 당시 증언이다. "1999년 여름 700~800mm의 대폭우가 쏟아졌다. 화천댐은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때 평화의 댐이 없었다면 화천댐이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북한강 수계(水系)의 다른 댐들도 무너졌을 것이다. '서울 물바다'가 현실이 될 뻔했다.

“ 노무현 정부는 댐 높이를 125m로 더 올렸다. 댐 중에서 가장 높은 소양강댐을 넘어섰다. 5공 때보다 공사비가 훨씬 더 들었다.


거대한 역사(役事)였지만 북쪽 눈치를 보면서 몰래 쌓은 ”정말 희극"이었다.

드디어 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수량 26억 3000만㎥, 유역 면적 3208㎢의 위용이 드러났다.

홍수조절 전용 댐이어서 발전(發電)용 수문(水門)은 없다. 주변에 '세계 평화의 종 공원'외에도 비목(碑木)공원, 물문화관, 상설 야외공연장 등이 연계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화천 ‘산천어 축제’에 인파가 몰려온다.

이제 댐 무용론은 사라졌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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