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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매거진= 남영진 논설고문] 11월 고대73학번 가을야유회의 마지막 일정은 양구에 있는 박수근(1914년~1965년) 미술관 관람이었다.
지금은 ‘국토의 정중앙 양구’(楊口)라는 슬로건으로 관광선전을 하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양구는 화천과 더불어 서울에서도 가기 힘든 오지였다.
우리 또래 친구들이 군에 가서 철원 화천등지에서 함께 최전방 근무를 하던 곳이다. 그때만 해도 양구를 까려면 춘천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40여 년 만에 관광버스를 타고 갔더니 의외로 가까웠다.
양구가 요즘 TV에 많이 나온 건 가을에 무청을 말려 만든 ‘시래기’의 토종상품 때문이었다. 나는 시래기나 ‘우거지’나 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시래기는 무를 잘라 김치를 담고 무청을 말려 된장을 풀어 시래기 국을 끓이는 그것이다.
우거지는 김장할 때 배추의 겉껍질을 말려 먹는 것이 대부분이라 재료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양구가 오염 안 된 청정지역이라 고랭지채소의 신선함과 청결함이 인기를 끌어 전국적인 시래기산지가 된 모양이다.
그는 지금 박수근미술관이 위치한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에서 1914년 태어났다. 산골 농가였기에 시래기 맛과 같은 토속적인 화가가 된 것이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렇듯 어렵고 고단한 시절을 힘겹게 살다간 대표적인 서민화가다.
대표작은 <빨래터 (1950년대),>, <나무와 두 여인 (1962)>, <아기 업은 소녀 (1960년대) 등이다. 이외 <창신동 집>(1950년대) <복숭아>(1957) <시장의 사람들>(1961) <농악>(1962) <굴비>(1962) <노상>(1960년대) <여인들>(1964) 등이 있다.
▲사진=미술관 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
박수근은 양구공립보통학교 때부터 그림에 흥미가 깊었다. 그는 미술시간이 좋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제일 처음 선생님이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셨을 때의 즐거웠던 마음이 잊을 수가 없어요.”라고 술회했다. 졸업 직후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이 병사한 뒤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와 망(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계속했다. 밀레의 작품 〈만종〉을 보며 키웠던 화가의 꿈을 모질게 이어갔다. 18세 되던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했다.
이후 선전(鮮)에서 여러 차례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하고 한국전쟁후인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됐다.
1955년 제7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는 <두 여인>으로 국회 문교위원장상을 받았다.
▲사진= 2018 박수근미술관 특별기획전 안내 포스터 ⓒ데일리매거진
26세 되던 해에는 인생의 가장 큰 동반자이자 반려자인 아내 김복순을 만났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사랑을 고백했다.
약혼 전 아내 김복순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러포즈가 담겨 있다.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던 작품 〈빨래터〉는 박수근 화백이 그녀를 처음 봤던 장소라 하니 작품의 의미마저 되새겨보게 된다. 결혼 후 평양의 도청 서기직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박수근은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공산 치하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혈혈단신 남하했다.
아내 김복순은 남매를 데리고 피난을 내려왔다가 서울 창신동에서 남편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후 박수근은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하며 붓을 다시 들었다. 고 박완서의 소설 <나목(裸木)>에 잘 드러나 있는 주인공이 박수근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956년까지 국전과 대한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해 여러 작품이 입상을 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짧았다. 삶도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그는 간경화와 응혈증이 시달리다 1965년 한창 예술혼을 발휘할 51세에 눈을 감았다.
▲사진=박수근미술관 가는길 ⓒ데일리매거진
2002년에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가 태어난 양구군 정림리에 박수근미술관이 개관됐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양구의 자작나무숲에 작은 개울물 등을 배경으로 회백색 바탕에 단순한 검은 선을 가미한 그의 특징적 기법이 잘 나타나 있다. “내 그림은 유화이지만 동양화다”라는 말처럼 그의 작품에는 화강암처럼 거친 듯 소박한 한국미가 느껴진다.
그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국전 추천작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사후에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화가가 됐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화가 작품 중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다. 지난 2007년 3월 그림 한 점이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45억 2,000만 원이라는 최고가를 경신하며 낙찰됐다. 이 그림이 50년 전에 박수근이 그린 〈빨래터〉다. 2006년 〈노상〉이란 작품이 10억 4,000만 원으로 최고가를 경신했는데 이듬해 3월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에 낙찰된 뒤 이어진 기록 재 경신이었다.
박수근 작품이 가장 비싼 이유는 서구의 화풍을 답습하던 당시의 한국 화단에 한국적인 특징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서양화에 동양화를 접합한 듯한 독창성으로 한국인의 서민적 생활상과 정서를 집약적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유학파들처럼 모더니즘의 기표 위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소재를 찾아 물감을 쌓고 굳히고 두텁게 하는 기법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진=박수근 화백 산소와 전망대 가는 길 표지판 ⓒ데일리매거진
오후 좀 늦게 들어간 미술관엔 올해 4월부터 내년 3월까지 ‘앉아있던 사람들’주제의 연중 전람회(아카이브 특별전)가 열리고 있다. 옆 그의 묘지에는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던 수줍은 분위기다. 나오다가 입구 카페 앞에서 떠들썩하던 10여명 친구들이 ”이렇게 즐거운 날 그렇게 조용하냐?“ 고 묻는다. 그냥 씩 웃어주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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