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세상이야기/베트남 기행①] 박항서 매직, 과거 마음속 앙금까지 녹였다

남영진의 세상이야기 / 남영진 논설고문 / 2019-01-10 10:07:28
푹 총리, 성공한 '박항서 정신' 바람직한 경제발전 모델로 제시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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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영진 논설고문


[데일리매거진= 남영진 논설고문] 박항서 감독의 18전 무패 기록이 깨졌다.

지난 9일 아부다비에서 열린 2019 아시아컵 예선에서 아시아의 강호 이라크를 맞아 계속 리드하다가 후반 4분여를 남기고 역전골을 허용해 3대2로 졌다. 전문가들의 고전 예상과는 달리 베트남 축구팀은 빠른 패스로 이라크를 공격해 첫 골과 둘째 골을 넣어 2대1로 전반을 마무리했다.


박 감독의 여러가지 제스처와 표정은 JTBC를 통해 한국에 생중계됐다. 적어도 축구에 관한한 한국과 베트남은 형제국이 된 것이다. 앞으로 비교적 약체인 예멘전에서 승리한다면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

지난달 베트남 축구단이 아시안 스즈키컵에서 우승할 때는 필자는 태국 방콕에서 TV로 봤다.


태국인들이 그렇게 축구광인지 몰랐다. 저녁때만 되면 음식점 커피숍 할 것 없이 대형텔레비전 앞에서 영국 프레미엄 리그나 독일 분데스 축구를 밤늦도록 본다. 이번엔 아시아컵인데도 열기가 더했다.


태국이 전 우승팀이라 결과에 더 관심을 쏟았다. 이번에도 우승을 기대했는데 준결승에서 말레이시아에 승부킥에서 졌다.


태국이 이러한데 처음 12월19일 결승전에서 우승한 베트남은 21일 호치민에 도착해 보니 한마디로 ‘난리’였다.


어딜 가도 ‘박항서 감독’이름이 화두에 먼저 올랐다. 아세안컵 첫 우승으로 박감독이 베트남 우호훈장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2017년 10월 베트남 축구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 사령탑을 동시에 맡은 박 감독이 베트남 축구 역사를 계속해서 다시 썼다. 2018년초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사상 첫 준우승 신화를 만들었다.


이어 지난해 9월 초 끝난 아시안게임에서 베트남 대표팀은 처음으로 4강에 진출했다. 특히 지난달 15일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에서 10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려 베트남 국민을 열광시켰다.


축구광들인 베트남 국민에게 동남아 최정상의 자리는 꿈같은 선물이었다.


베트남의 자존심을 다시 살려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항서호가 경기를 거듭할수록 경기장 안팎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숫자는 급속도로 늘었고, 박 감독의 대형 사진을 들고 응원하는 것도 축구 팬들의 일상이 됐다. 지난달 25일 북한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도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우승직후인 지난달 21일 박 감독에게 우호훈장을 수여하면서 "이번에 한국과 베트남 양국 국민 사이의 마음이 매우 친밀해졌다"고 말했다.


푹 총리는 이에 앞서 박 감독을 외국인투자기업, 축구 대표팀 선수들을 베트남 기업으로 비유해 현지화에 성공한 '박항서 정신'을 바람직한 경제발전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라까’라는 가죽제품 전문점에서는 베트남에 사는 한국교민이 방문하면 자사 제품 한 개씩을 무료로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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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필자가 촬영한 베트남 호치민의 TV방송에 출연한 박항서 감독 모습, 베트남TV에서는 매일 박항서 감독이 출연한다. ⓒ데일리매거진

12월 21일 호치민시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식사를 베트남친구들이 베트남 식당으로 초대했다. 교수이자 컨설팅그룹의 오너인 득사장이 회사 관계자, 기자 등 베트남 지인 7-8명을 데리고 나오면서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을 초대했다.
필자를 소개한 한국인 디벨로퍼인 김태환사장과 한국기업인인 김태근사장, 그리고 후배인 정민승 한국일보 베트남특파원과 고교후배인 권택서, 물류업을 하는 곽태삼사장 등 한국인 지인 7-8명을 데리고 나갔다. 이날 영어로 대화가 시작됐지만 곧바로 축구화제가 나오자 한약재로 만든 달달한 베트남 전통술 ‘원샷!’을 거듭했다. 결국 모두 대취했다.


'박항서 매직'은 젊은이들은 물론 63년-74년 10여년 베트남전에서 파월 한국군과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참전용사들의 마음도 녹여내고 있다.


전쟁 후 시간이 많이 흘러 한국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는데 박 감독 덕분에 그 때의 앙금을 털어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베트남 국민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이미 K-pop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이번 겨울 방학에 우선 한국 여행을 다녀 오겠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2002년 ‘대~한민-국!’같은 응원구호도 생겼다. '박.항.서'를 연호하듯 남아공 올림픽 신무기였던 부부젤라를 3번 끊어 불면 '비엣남'(베트남의 현지 발음)을 연호하는 새로운 응원문화. 내가 12월 21-25일 묵었던 호텔 건너편에 벌써 ‘부부젤라’라는 바가 생겼다. 마침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앞두고 있어 호치민의 구도심인 1구역 곳곳에서 오토바이 행렬과 경적소리가 어울려 거리의 ‘불야성’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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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베트남 축구가 스즈키컵 유승직후 방문한 호치민시는 성탄절과 겹쳐 불야성을 이루었다. 필자가 촬영한 호치민시의 야경 ⓒ데일리매거진

박항서 감독의 인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호감으로 연결되고 있다. 박 감독을 광고모델로 쓰고 있는 베트남 진출 한국기업은 물론 한국 제품 매출이 쑥쑥 커지고 있다. 이미 신한은행은 아시안컵 전부터 신문에 박 감독을 전면 광고로 실어 홍보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한다. 신한은행이 우승까지 내다보고 박 감독과 계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박을 잡은 것이다. 우승 후 각 기업에서 광고계약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지난달 베트남 네티즌 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박 감독이 모델로 나오는 K푸드 광고를 본 뒤 K푸드를 살 의향이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100%가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한국 식료품을 판매하는 K-마트는 박 감독을 광고에 활용하지 않는데도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매장의 매출이 최근 20∼30% 늘었다고 한다. 이미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대형 공장을 세운지 오래돼 베트남 GNP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여서 한국인과 한국 상품에 대한 주가가 오르고 있는 것이다.


현지 교민신문에 의하면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도 베트남팀 우승이후 "박항서 감독 신드롬으로 한국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김대사는 "베트남전 참전으로 과거에는 양국 간에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박감독 인기에 따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고 있다"며 외교활동을 하면서 피부로 느낀다고 밝혔다. 베트남 총리가 나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박항서 매직’이 베트남 국민의 자존심을 살릴 뿐 만 아니라 과거 40-50년 전 마음속 앙금까지 녹여주고 있는 게 ‘기적’(매직)인 셈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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