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일리매거진= 남영진 논설고문] 오는 2월27일-28일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다. 양국의 외교진들은 물론 이를 취재하기 위해 양국의 언론인들은 물론 전세계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제3당사국이기도 한 우리 언론인들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하노이에 프레스센터를 설치하고 취재경쟁에 돌입했다.
당초 1차에 이어 싱가포르가 유력지로 떠오르다 몽골, 평양, 판문점등 여러 곳이 후보지로 거론됐다. 마지막 국가로는 베트남이 유력해졌다.
다만 정치의 중심지인 수도 하노이냐 아니면 베트남전당시 미군이 주둔했던 다낭이 경합하다가 결국 북한의 주장대로 하노이로 정해졌다.
하노이는 오랫동안 베트남 북쪽의 중심지였다. BC 3세기에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 때부터 이 지역에 관심을 쏟다가 한나라 무제 때 동북쪽으로는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고 남서쪽인 이 지역도 한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양자강 이남의 월(越)나라를 넘어 남쪽에 있는 지역이라 베트남(越南)으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조조에 의해 망한 오나라의 한 부족인 월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건너와 홍강 삼각주에 도시를 세운 것이다.
1831년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의 ‘하노이’(河內)로 공식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다낭, 하노이 2곳이 정상회담 개최지로 거론될 때 대부분은 ‘스트롱맨’인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이 당연히 다낭을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필자가 촬영한 지난해 연말 호치민시에 있는 성모상이 있는 노트르담 성당 앞에 모인 관광객들이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데일리매거진
미국 건국 250년이 가까워 오는 역사에서 처음 비긴 전쟁이 한국전쟁이고 처음 패한 전쟁이 베트남전이다. 그러니 미국으로서는 ‘패전 트라우마’가 있는 하노이에서 고전했던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일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베트남을 택했고 마지막 협상대표였던 비건이 평양에 가서 김혁철과 회담한 후 하노이로 결정된 게 의아했다.
역시 미국은 통이 큰 나라이고 트럼프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장사꾼’이다. 체면이나 과거의 나쁜 기억을 뛰어넘어 ‘작은 것’을 주고 실리를 택하려는 전략이다.
할아버지 김일성의 권위를 이어받으려는 김정일로서는 할아버지가 1957년과 1964년 두 번이나 국빈 방문해 당시 월맹의 호치민과 무력통일전략을 상의하던 상징적인 하노이를 고집했을 것이다.
베트남과 북한은 함께 독립전쟁을 치룬 한국과 미국관계와 같은 ‘혈맹’이다.
1950년 6월 북한인민군이 남침해 6개월 치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 등 연합군에 의해 청천강, 압록강까지 밀리며 괴멸되자 중공군이 들어와 거의 2년 반을 3,8선을 중심으로 한국군, 연합군과 싸웠다.
이때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와 포탄등을 전쟁이 끝난뒤 중국을 거쳐 호치민 휘하의 게릴라군에게 실어 날랐다.
1954년까지 북부베트남에 주둔했던 프랑스 식민지군은 지금 라오스와 베트남의 접경지대 디엔비엔푸에서 보응웬지압(武阮甲)장군이 지휘하는 월맹군에게 무장해제돼 제네바협정으로 북위17도선을 국경으로 월맹과 월남이 나뉜다.
이 디엔비엔푸 전투 때 한국정쟁기간 미군에게 노획한 대포를 해체해 자전거에 싣고 고지에 올라가 평원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에게 포탄을 퍼부어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김일성 주석(당시 수상)은 1958년 11월 하순 중국 방문에 이어 처음으로 신생국인 ‘베트남민주공화국’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가 12월 초순 중국을 거쳐 귀국했다. 27일 광저우에 도착해 하룻밤 묵은 뒤 28일 그곳까지 영접 나온 베트남 인사들과 함께 특별기를 이용해 하노이로 향했다. 1957년 7월 호치민 베트남 주석이 해방전쟁 지원에 대한 감사차 평양을 방문했던 것에 대한 답방이었다.
김일성은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고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돌입하자 11월에 베트남을 비밀리 방문해 군사고문단 파견, 군사훈련 지원 등을 논의했다.
▲사진=필자가 촬영한 호치민 공원에서 성탄축하연 연습하는 젊은이들 ⓒ데일리매거진
미국으로서는 1995년 베트남 미국 수교로부터 지금까지 미국 현직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4번째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2000년 11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16년 11월에 각각 베트남을 방문했고 마지막으로 오바마대통령이 2016년 5월에 방문한바 있다.
또 베트남 미국 수교 20년이 되는 2015년 7월에는 응웬 푸·쫑 공산당 서기장이 베트남 공산당 최고 지도자로서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오바마대통령은 베트남이 국가방위를 위해 원하는 전략적 물자 거래의 길을 열어주는 큰 선물을 주었다. 적국으로 간주해온 이 나라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를 해제했다. 아울러 보잉사 제작 항공기 100대를 베트남이 수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베트남 민간항공회사가 필요로 하는 플랫앤휘트니 제작 항공기 엔진 150대 분의 수입 요구를 허용했다.
이는 물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속셈이었다. 당시 베트남도 미국 군함의 캄란만(灣) 사용을 비밀리에 허용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캄란만은 호치민(옛 사이공)시로부터 30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항구이자 해군기지다. 수심이 깊고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던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미군의 전략 요충지였다.
한국의 청룡부대가 그 인근에 주둔해 한국 군함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1905년 러일전쟁때 북해에서 출발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한반도로 올 때 중간 기항했던 역사적 장소다.
캄란만은 바로 중국과 베트남간에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남지나해의 파라셀군도와 스프래틀리군도에서 약 4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인도차이나의 요새다.
프랑스가 휴양지로 개발한 낫짱근처라 이번에 거론된 다낭과도 가깝다.
미국 항공모함이 이 기지를 다시 사용하게 된다면 중국으로서는 남중국해 제해권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된다. 이미 필리핀 수빅만 주둔을 회복한 미국이 베트남의 캄란만 기지 사용권까지획득한다면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작전능력이 배가된다.
트럼프대통령이 이번 북미회담에서 북한의 영변기지폐쇄와 종전선언을 빅딜하는 외에 베트남항공의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직항편을 허용하고 베트남이 미국과 캄란만의 군사협력을 강화한다면 베트남은 국제적 위상강화는 물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 데일리매거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