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백의의 천사 병들게 하는 '태움 문화'

사회 / 김영훈 / 2018-02-22 14:12:49
간호사 인권침해ㆍ대다수 '태움' 피해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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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매거진=김영훈 기자] 최근 서울에 한 대형병원에서 신입 간호사 A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일명 '태움'이라고 불리는 간호사 계열의 악습에 고통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되고 있다.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신입 간호사를 가르치며 폭언ㆍ폭행을 일삼는 은어다. 간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실수가 생기면 안 된다며 군기를 잡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태움'은 이미 오래전부터 간호계에 이상하고 고질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숨진 A씨의 남자친구는 한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태움이 고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 요소 중에 하나"라고 폭로했다. 이번 사건이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경찰 수사에서 밝혀져야겠지만 이 기회에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 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는게 간호업계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따르면 A씨는 입사 후 6개월의 신규적응교육기간동안 살이 5kg 빠질 정도로 극심한 업무량과 태움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간호사의 업무 과중과 이로 인해 생기는 태움 문화를 개선해달라는 청원이 시작됐다. 지난 18일 올라온 이 게시글은 하루 만에 약 1000명의 지지를 얻었다.


치료를 통해 환자의 고통을 덜고, 따듯한 손길로 마음까지 치유하는 간호사라는 직업. '백의의 천사'라 불릴 정도로 순백의 이미지로 비춰지는 그들이지만 사실 병원에서의 간호사의 삶은 녹록치 않다.


'태움' 문화 그 실태는?


A씨의 죽음에 간호사 커뮤니티에는 '나는 너다. 그녀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임이기도 하다'는 글과 함께 흰색 국화 사진이 올라왔다. 그 이후 간호계 내 자리잡은 '태움 문화'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첫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B씨는 신입 시절을 회상하며 "온몸을 태웠다"고 말했다. 대형 병원의 간호사가 됐다는 기쁨도 잠시 선배들의 '극한 가르침'으로 인해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는 마음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B씨는 선배 간호사한테 일을 배우다가 도중 실수라도 하면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들을 가만히 들어야 했다. 욕 받이가 된 기분"이라며 "나는 괜찮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기 힘들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병원에서 실습 중이라는 C씨는 "잘 몰라서 선배한테 다시 한 번 물어봤을 뿐인데 '초등학생을 가르쳐도 너보다 낫겠다'고 폭언했다"며 "불렀는데 뒤돌아보지 않았다며 발로 툭툭 차거나 주먹으로 등을 치기도 했다"고 서러움을 토로했다.


대한간호사협회와 보건복지부는 최근 1년 사이 간호사 중 40.9%가 직장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20일 발표했다. 협회는 지난해 12월28일부터 지난달 23일까지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7275명의 간호사가 설문에 참여했다.


이들을 괴롭힌 가해자는 직속 상관인 간호사나 프리셉터가 30.2%로 가장 많았다. 이어 동료 간호사(27.1%), 간호부서장(13.3%), 의사(8.3%) 순이었다. 고함이나 폭언을 경험한 간호사가 가장 많았다. 험담하거나 안 좋은 소문을 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간호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병원의 지원부족, 허술한 교육시스템을 원인으로 꼽는다. 나영명 보건의료산업노조 정책국장은 "인력을 확충해서 근무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태움의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간호사 조직 내 수직적ㆍ폐쇄적 문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다만 이를 간호사 개인이나 일부 병원의 문화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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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연합뉴스


1인당 환자 20명…12시간 살인적 노동
근무환경 10년째 제자리 걸음


'태움'을 근절시키려면 간호사의 근로 환경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경우 간호사 한 명이 맡은 환자 수가 많고 업무가 몰리다 보니 신규 간호사들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보통 3교대로 24시간 근무를 하는 간호사 사회에서 1명이 업무에 미숙하면 다음 근무 간호사의 업무가 가중되는 점 역시 스트레스를 높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신입간호사는 업무 처리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기 때문에 가뜩이나 일이 많은 선배의 간호사의 태움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보건의료노조의 실태조사 결과, 간호사의 직장생활과 노동조건(직장생활 불만족도 2.62점 , 업무량 변화 4.98점, 인력부족 2.89 점, 감정노동 수행 정도 3.18점) 등을 종합해 보면, 병원 내 다른 직종에 비해 간호사의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은 열악한 편으로 확인됐다.


또한 대한간호협회가 지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간호사들의 실태조사 연구결과를 분석한 결과 병동 간호사 1명이 담당하는 환자 수는 2016년 기준 19.5명으로 OECD 기준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 간호사 1명당 7명, 미국 5.4명, 캐나다와 호주가 4명인 것과 비교해 3배~5배까지 높은 노동 강도를 담당하고 있는 것인데, 실제로는 간호사 1인당 25~4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심각한 상태이다.


즉,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고 국민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는 간호사 부족 문제에 정부는 간호대학 신증설과 입학정원 확대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신규 간호사에 대한 교육 기간을 확충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등 개인이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양한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간협 관계자는 "태움은 폐쇄적인 의료계 조직문화와 충분하지 못한 간호사 부족 문제 등이 합쳐지면서 발생하고 있다"면서 "인력수급대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움을 당한 간호사들은 간호인력 문제 또한 태움의 한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고질적인 악습인 태움은 인력부족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사라져야 할 하나의 문화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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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16 병원간호인력 배치현황 실태조사 [출처/병원간호사회]


'태움' 문화에 이직률 '심각' 수준


'태움' 문화는 잦은 이직의 대표적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에선 응답자의 66.9%가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이직을 고민한 적 있다"고 답했다. 충격적인 것은 '한 주에 한 번가량 괴롭힘을 당한다'는 이들 가운데 자살을 생각한 비율이 20.6%나 됐다는 점이다.


또 19%는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경험했다고 응답해 간호사들의 업무환경이 크게 열악할 뿐더러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을 방증했다.


구체적으로는 원하지 않는 근로를 강요하거나 연장근로를 강제한다는 응답이 각각 2천477건과 2천582건으로 가장 많았다. 연장 근로에 대한 시간 외 근로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응답도 2천37건, 연차유급휴가의 사용을 이유 없이 제한한다는 응답도 1천995건에 달했다.


생리휴가나 육아휴직, 임신부 보호 등 모성보호 관련 인권침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도 21.7%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간호사들은 그 어떤 직종보다 이직율이 높다.


지난 2015년 기준 대한간호협회 조사에 따르면 신규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은 무려 33.9%에 달하며 간호사 평균 근속연수는 5.4년에 불과하다.


간협 관계자는 "중소병원 간호사들의 이직을 막고 출산·육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탄력근무제의 도입을 통한 구체적인 유휴간호사 유입방안 마련과 함께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전면시행이 우선돼야 한다"며 "인력확충이 단지 병원 사용자측의 비용부담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과제라는 인식개선도 함께 진행돼야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언했다.


아울러 그는 "분석 결과 3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들의 경우 앞에서는 간호사 부족을 가장 많이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간호사 근무여건 개선에 나서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며 "간호사 법정인력 기준 미충족 병원에 대한 강력한 법적제재 장치 마련과 이를 위한 수가체계 개선 방안 등 다양한 방안을 즉각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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