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서울 훈정동 종묘공원 후문 앞 공터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인들 200여명이 모여있었다. 보수성향인 이들은 대부분 어버이연합 회원들이다. 매일 오후 1시 이곳에서는 안보토론회가 열린다. 300여명의 노인들이 참석해 강연을 듣고 토론도 진행한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강단에는 '자유대한민국을 지킵시다'라는 플래카드 밑에 '종북 좌파 세력 척결, 전교조 해체, 현대사회 바로 세우기,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비슷한 시각 종묘공원 내 종묘광장관리사무소 앞에서도 2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 열띤 토론이 벌이고 있었다.
한 노인이 큰 소리로 "한나라당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어. 나경원이 시장되면 안돼"를 외치자 순식간에 그의 주위를 에워싼 노인들은 연신 "맞다, 맞어"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종묘공원에서 노인들 간에 정치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매년 선거철만 되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들은 10년 전만 해도 탑골공원을 주로 찾았었다.
하지만 2001년 서울시가 3·1운동의 전원지를 기념하기 위해 '성역화 사업'을 실시한 후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이 하루 50여명 정도로 급격히 줄었다. 대신 근처에 있는 종묘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기에만 해도 노인들은 '할일은 없는데 시간은 많아서'가 공원을 찾는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2006년 5월 어버이연합이 결성되면서부터 좌우 이념대립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종묘공원과 노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매일 이곳에는 2000~3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온다. 이들 가운데 매일 오는 노인들은 1000여명 정도. 그 절반인 500여명은 박근혜와 나경원 지지파들이다. 이들은 주로 공원 후문 앞 공터가 주요 거처다. 다른 곳은 잘 가지 않는다. 혹시나 모를 이념다툼에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익 성향인 이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어버이연합회 회원들이다. 전체 어버이연합회 회원 1500여명 가운데 이곳에 자주 오는 회원은 500여명 정도다.
어버이연합 회원인 허모(83)씨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온다. 노인복지관은 잘 가지않는다. 밥이나 얻어 먹기 위해 간다는 주변사람들의 인식도 싫지만 이곳에 오면 친구들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막걸리도 기울일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 때문"이라며 "박원순은 김정일보다 더 나쁘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관이 없다. 막장토론 안하는 것은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에 자주 오는 진보성향 노인들은 300여명 정도다. 아사달 노인회 회원인 이들은 종묘광장관리사무소 앞이 주요 거처다. 다른 곳을 가는 것은 엄두를 못낸다. 가더라도 아무말 없이 앉아있기만 한다. 잘못했다간 몸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신을 진보라고 소개한 김모(56)씨는 "어버이연합 사람들은 자신과 이념이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세운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이고 저쪽 사람들은 국가 쪼개 놓는 사람들이자 친일파들"이라며 "우리는 집회도 허가 안해주는데 저쪽은 허가도 내주고 마이크 잡고 떠들어도 정부가 묵인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나머지 200여명은 이상재동상 인근이나 공원 중앙에 있는 바둑을 두는 곳에 몰려 있다. 이들은 특별한 성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에서는 최근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언쟁이나 가벼운 몸싸움 같은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찰에 신고되는 것은 한달에 5~6건 정도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빈번하다는 것이 노인들의 전언이다.
거의 매일 이곳에 온다는 이모(72)씨는 "여기서는 함부로 자신의 정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며 "보수단체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진보구역으로 가서 자기 의견과 다르면 괜히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조사에서 박원순이 10% 이상 앞질렀을 때만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박원순과 나경원의 지지율이 비슷해 진 이후 부터 더욱 심해진 듯하다"며 "최근 일주일 새 그런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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