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민감한' 중소기업 적합업종·품목의 지정이 일단 마무리됐다.
동반성장위윈회는 4일 제9차 동반성장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LED조명, 두부, 레미콘 등 25개 품목을 중소기업 적합업종품목으로 지정하고 대기업의 사업철수나 시장진입 또는 사업확장을 자제토록 요구했다.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지 못하도록 중소기업의 고유영역으로 제한해 놓음으로써 사실상 합법적인 '금지구역'을 설정한 셈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많은 중소기업으로부터 그동안 대기업과 협상 채널이 없었는데 동반위와 조정협의체를 통해 대기업과 동등하게 협상하는 소통장을 마련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것이 성숙된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특히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점에서 약 3년동안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숨통을 틔워서 산업계 동반성장 계기를 마련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데스크톱PC, 레미콘 등 핵심 쟁점업종은 합의 실패, 애매한 권고…
동반성장위는 지난 5월 중소기업으로부터 신청받은 총 234개 품목 중 대·중소기업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 민감한 품목 45개를 추려냈다.
4개 업종은 신청이 반려되고 2개 품목은 자진해서 접수를 취소하는 등 총 218개 품목 중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업종에 대해선 심사를 보류하고, 대기업이 진입한 133개 품목 중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이해관계가 첨예한 45개 품목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동반성장위는 초반부터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업종부터 건드렸다. 이는 중소기업계의 시급한 사정과 줄기찬 요구를 수용한 측면도 있지만, 초반부터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 쟁점업종부터 정리해야 동반성장의 고삐를 죄고 향후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내부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관측된다.
동반성장위는 지난 9월27일 세탁비누, 고추창, 순대, 막걸리 등 우선적으로 합의가 도출된 16개 품목을 1차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선정한데 이어, 한 달이 지나 당초 약속한 시점을 넘겨 나머지 25개를 2차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발표했다.
이번 2차 적합업종 품목으로는 김치, LED조명, 어묵, 주조(6개품목), 단조(7개품목) 등 총 16개 품목에 대해 일부 사업철수 결정을 내렸다.
또 식빵(햄버거용 빵)은 사업축소, 남자 및 소년용 정장(맞춤양복)은 시장 진입자제 조치를 각각 내렸다. 김(조미김)은 사업 확장자제를 권고하고, 두부와 기타 판유리가공품, 기타 안전유리, 원두커피, 생석회 등 5개 품목은 시장진입 및 사업확장자제 조치를 결정했다. 레미콘은 사업 확장자제 및 신규 대기업 진입자제 결정을 내렸다.
당초 위원회는 29개 품목을 검토할 계획이었지만 일부 품목은 판단유보(디지털도어록)나 반려(내비게이션, 플라스틱 창문 및 문, 정수기), 심의연기(데스크톱PC) 결정을 내렸다.
1차 적합업종 선정 당시 시간에 쫓긴 채 여론에만 밀려 서둘러 미완성작을 내놓다 보니 대부분의 민감한 품목들은 빠져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동반성장위는 이번 2차 품목 역시 일부 민감한 품목은 명확한 합의를 이뤄내지 못해 협의과정의 진통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2차 적합업종의 권고조치인 '일부 사업철수' '사업축소' '사업 확장자제' '시장 진입자제' '시장진입 및 사업확장자제'와 같은 '잣대'를 둘러싸고 적잖은 잡음이 일고 있다.
동반성장위는 지난 1차 발표 때 보다 좀 더 세분화된 잣대로 시장에 명확한 시그널을 준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업계에서는 일부 사업철수, 사업축소, 사업 확장자제 등의 개념이 불명확하고 판단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반응이다. 오히려 기업과 시장에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예를 들면 같은 품목군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참여하는 시장이 나뉠 수 있다. 어묵(일부 사업철수와 사업축소)의 경우 대기업은 급식시장 공급업체에 대한 직접판매를 자제하거나 OEM사업에서 철수토록 하고, 김(사업 확장자제)은 초중고 급식시장과 전통시장, 군납시장에서 사업확장을 자제토록 했다. 김치의 경우 일반식당, 대학 등의 시장은 철수하고, 중고교 급식시장과 군납시장은 사업을 확장자제토록 했다.
이에 대해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일률적인 기준이나 틀에 일부러 끼워 맞추기보다는 각 품목별로 다양한 시장특성을 반영하다보니 1차 발표 때 보다 권고조치가 좀 더 세분화 된 것"이라며 "단계별 단순 구분을 지양하고 품목별로 다양한 권고를 통해 제도의 취지를 적극 반영하도록 노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원만한 합의보다는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사실상 동반성장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게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2차 선정작업에서는 레미콘, LED조명, 데스크톱PC 등의 품목들이 대·중소기업간 입장차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동반성장위는 내부 사정을 이유로 협의과정에서의 자율조정이나 강제권고 품목 등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곽수근 중소기업 적합업종 실무위원장(서울대 교수)은 "여러분들이 우려한 것보다는 여러 분들이 밤잠 안자고 협의과정을 거쳐서 의견접근을 이뤘다. 쟁점품목은 몇 개 안된다"며 "전반적으로 조정협의가 잘 이뤄졌다고 이해해 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쟁점은 일단 종지부…실효성은?
중소기업계에선 동반성장위가 발표한 적합업종·품목에 대해 여전히 기대에 차지 않는다며 불만스런 분위기다.
동반성장위원회가 핵심 쟁점품목은 결과적으로 합의를 타결시키지 못해 최종 리스트에서 누락시키거나, 대기업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의식해 1차 선정당시 권고조치인 '사업이양'대신 '일부 사업철수'라는 종전보다 소극적인 처방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반성장위원회가 2차례에 걸쳐 발표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총 41개 품목들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동반성장위의 조직성격 자체가 민간기구라는 한계에 직면한 데다 동반성장 주무부처인 지식경제부와도 껄끄러운 관계여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다. 정부가 직접 팔 걷고 나서서 고시나 개정안 등을 통한 적합업종 보호가 법적 테두리 내에서 가능할지 의문시되고 있다.
만약 국회에서 논의중인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될 경우, 현재 양국간 협의가 최종 마무리된 한미 FTA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칫 상대국의 반발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해외기업들도 국내 시장에 진출할 경우 걸림돌로 작용해 반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국내 대기업에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에서 물러나라고 권고했으면서도 다른 외국계 기업의 진출은 막지 못한다면 역차별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계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이 당초 예상과는 달리 미온적이고 미숙하게 운영될 뿐만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는 중소기업계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고 않아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불만이 팽배해진 것이다.
급기야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적합 선정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며 강도 높게 비판할 정도다.
이에 대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의 법제화 필요성에 대해선 즉답은 피하면서도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밝혔다. 동반성장은 법적 강제력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자발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종전 원칙을 고수했다.
정 위원장은 "성숙한 기업가정신이 부족한 대기업이 기득권을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것이 얼마나 실효성 있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오늘 발표에 대해서 대중소기업 모두 만족하지 못할 수 있지만 여기에 승복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 데일리매거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